전국의 서원(書院)

봉례면 덕양서원

雲高 金容捧 2014. 8. 13. 04:39

2014년8월7일 목요일

덕양서원은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덕흥리 668-2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53(1984.02.25지정)

덕양서원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당시 좌의정이었던 이건명(李健命)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1768(영조 44)에는 송연악(宋延岳), 박유석(朴裕錫) 등 고흥 관내 사림이 주력이 되어 이건명(李健命)의 사적을 기리는 유허비를 세우는데 덕양서원이 이때 사당의 형태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유허비는 건립이후 150여년이 지나면서 퇴락되어 1928년 이건명의 8대손 이정호의 발의와 관내 사림의 협력으로 비각의 중건과 덕양서원의 건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당시 중건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명현(名賢) 선조가 추배되었는데 이의천(李倚天), 정동준(鄭東浚), 이린기(李麟奇), 오광생, 노주관(魯周觀), 문약연(文躍淵), 정소송, 정난파(鄭蘭坡), 명중화(明重華) 9위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유록(綏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경여(敬輿)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민서(敏敍)이며, 어머니는 정승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1684(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6년 춘당대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에 임명되고 수찬(修撰)·교리·이조정랑·응교(應敎)·사간을 역임하였다. 169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승지·대사간·이조참의·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17년 종형 이이명(李頤命)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숙종과 단독 면대했던 정유독대(丁酉獨對) 직후, 특별히 우의정에 발탁되어 왕자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았으며, 숙종상(肅宗喪)에 총호사(總護使)로서 장례를 총괄하였다. 이어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해 김창집(金昌集)·이이명·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에 노력했으나, 이로 인해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1722(경종 2)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興陽)의 뱀섬蛇島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러다가 앞서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 세자 책봉을 요청하는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증(痿症)이 있다고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소론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하였다.재상으로 있을 때 민생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당시의 현안이던 양역(良役) 문제에 있어서 감필론(減疋論 : 군포 2필을 1필로 감하자는 주장)과 결역전용책(結役轉用策 : 수령이 私用으로 쓰는 田結雜役價를 전용해 감필에 따른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자는 방책)을 주장해,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문에 능하고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다. 송시열(宋時烈)을 학문과 정치의 모범으로 숭배했으며, 김창집 형제 및 민진원(閔鎭遠)·정호(鄭澔) 등과 친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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