꽂(봄.여름.가을.겨울) 156

순천 왕의길 꽂무릇

2022년9월13일 화요일 순천 왕의길은 가로 공원으로 1년 내내 아름다움을 선사 하는 공원이다 봄에는 철쭉꽂과 다양한 꽂들이 피고 여름이면 보라색의 맥문동이 피핀다 가을이 오면은 예쁜 꽂무릇이 장관을 이루고 단풍또한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의 휴식 공간이 되어 주기도 하고 산책코스로도 손색이 없는 가로 공원이다 매는 9월 중순이 지나면 가로 공원 꽂무릇 축제가 열린다 지역 축제라 소규모로 열리지만 많은 사람들로 부터 곽광을 받는 축제로 자리 매김 하였다

모감주나무와꽂

2022년6월30일 화요일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바닷에 천년기념물(138호)인 모감주나무 군락지가 있다 이 군락은 길이가 120m에 달하고 중간 부분의 너비는 15m에 이른다. 바닷가를 따라서 늘어서 있는데 농지와 민가에서 300m가량 떨어져 있어서 방풍림의 구실을 하고 있다 모감주나무는 경기도와 경상도 일부 지역에도 분포하고 있으나 안면도의 모감주나무 숲처럼 넓은 면적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 없어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모감주나무는 중국에서 바닷물을 타고 밀려와 싹을 틔운 것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중국의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하러 왔다가 심었다는 설도 있다 모감주나무 군락은 돌담에 둘러싸여 있고 바닥은 자갈로 덮여 있다. 높이 2m에 밑동 지름 5cm가량의 나무 400~500여 그루가 자라고 있..

능소화꽂

2022년7월7일 목요일 능소화꽂의 전설을 보면은 구중궁궐의 꽃’이라 칭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옛날 옛날 복숭아 빛 같은 뺨에 자태가 고운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답니다 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사이 빈의 자리에 앉아 궁궐의 어느 곳에 처소가 마련되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임금은 그 이후로 빈의 처소에 한번 찾아 오지를 않았다 빈이 여우같은 심성을 가졌더라면 온갖 방법을 다하여 임금을 불러들였건만 아마 그녀는 그렇지 못했나 봅니다 빈의 자리에 오른 여인네가 어디 한 둘이었겠습니까 그들의 시샘과 음모로 그녀는 밀리고 밀려 궁궐의 가장 깊은 곳 까지 기거 하게 된 빈은 그런 음모를 모르는 채 마냥 임금이 찾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혹시나 임금이 자기 처소에 가까이 왔는데 돌아가지는 않았는가 싶어 담장을 서성이며 ..

산청 꽂잔듸 축제

2022년4월28일 목요일 산청에서는 봄에 꽃잔듸를 쉽게 볼 수 있다 생초국제조각공원과 산청휴게소 대명사에서는 주변 경치와 빨갛게 조화를 이룬 꽃잔듸 군락이 눈에 띈다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이색 꽃 풍경이 눈을 사로 잡는다 생초국제조각공원은 꽃잔듸와 함께 다양한 모습의 조각으로 유명하다. 1999, 2003, 2005년 산청국제현대조각심포지엄에 참여한 조각가들이 만든 작품이다. 방문객이 많이 찾기 때문에 제법 너른 주차장도 조성됐다 생초조각공원에는 가운데 부분의 광장을 중심으로 양쪽에 두 개의 언덕이 자리를 잡고 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삼은 오른쪽 언덕은 온통 분홍색, 보라색, 하얀색 꽃잔듸로 덮였다. 오른쪽 언덕 곳곳에는 꽃잔듸보다는 조각 작품이 더 눈에 띈다. 따가운 봄 햇살이 거추장스러운지..

이천 산수유꽂에 반하다

2022년3월26일 토요일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일대에서 매년 열리는 축제는 코로나19로 열리지 못하고 있으나 많은 사람이 찾아 오고 있다 원적산(563m)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도립리마을은 수령 100년이 넘는 산수유와 500년 된 느티나무 고목이 어우러져 있다.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1519년)를 피해 낙향한 선비 엄용순을 비롯한 6명의 선비가 이곳에 육괴정(六槐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주위에 느티나무와 산수유나무를 심은 것이 산수유마을의 시초다. 육괴정이란 이름도 여섯 선비가 우의를 기리는 뜻에서 정자 앞에 작은 연못을 파고 각각 느티나무 한 그루씩을 심은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마을쪽으로 15분 정도 걸어가면 야트막한 돌담 안에 들어선 집들을 지나 아주 작고 네모진 돌 연못도 보..

만년교에 봄이 왔네요

2021년3월21일 수요일 영산 만년교는 보물제 564호로 예전 있던 나무다리가 큰물에 자주 떠내려가자 조선 정조 4년(1780) 영산의 백성들이 힘을 합쳐 돌을 떠다가 놓았다고 한다 그때 영산에 사는 김윤관(金允寬)이란 사람이 일을 주선하고 백진기(白進己)란 석수가 다리의 축조를 담당하였다. 말하자면 순수하게 백성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다리인 셈이다. 아마도 다리가 주는 꾸밈없고 서민적인 인상도 이런 데서 연유한 듯싶다 그 뒤 고종 29년(1892) 만년교를 중건하였는데, 이때는 현감 신관조(申觀朝)가 일을 주관하고 현풍에 사는 김내경(金乃敬)이 돌 다루는 일을 맡아했다고 한다. 북편 다리 입구 양쪽에 서 있는 남천석교비(南川石橋碑)와 석교중건비(石橋重建碑)에 이런 내용들이 씌어 있다 다리 남쪽 입구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