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8월7일 목요일
고흥 서동사(高興西洞祠 )는 전남문화재자료 제155호로 1987년 9월 18일 지정 되였다
서동사는 매산송씨 충강공 송간(1405∼1480년)을 주벽으로 송대립(1550∼1598년), 송심(1590∼1637년), 송순례(1528∼1597년), 송희립(1553∼1623년), 송건(1558∼1592년)과 김시습(1435∼1493년)등 11위를 향사하는 곳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송간(1405∼1480)을 중심으로 송대립·송심·송순례 등의 여산 송씨와 매월당 김시습 등 11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송간은 세종, 문종, 단종의 세 임금을 섬겨 벼슬이 가선대부까지 이르렀다. 1455년 왕의 명령으로 남방을 순시하고 돌아오는 길에 단종이 영월로 쫓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영월에 가서 단종에게 그의 임무가 끝났음을 알렸다. 그 뒤 바로 고향인 여산에 가 있다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산 속에서 3년 상을 마치고 통곡하며 산천을 돌아다니다 생을 마쳤다. 건물은 정조 9년(1785)에 여산 송씨인 송간·송대립·송심과 고흥 유씨인 유탁 그리고 영광 정씨인 정연희를 함께 모시고 ‘운곡사’란 이름으로 세웠다. 10년 뒤인 정조 20년(1796)에는 3성씨를 분리하여 건물을 따로 마련하고 ‘세충사’로 고쳐 불렀다. 순조 1년(1801)에는 송건·송순례·송희립을, 순조 33년(1833)에는 송상보·송득운·송석륭을 추가로 모셨으며 헌종 12년(1846)에 매월당 김시습을 함께 봉안하였다. 흥선대원군 때 훼손되었으나 1956년 지금 있는 자리에 다시 세우면서 송홍연과 송진부를 추배해 모두 11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그밖에 강당과 동재, 서재, 창효사, 양평문, 내외삼문 등의 건물이 같은 경내에 들어서 있다. 이 사우는 정조 9년(1785) 최초 건립 당시 여산송씨 송간, 송대립, 송심과 고흥유씨 유탁(1311∼1371년), 영광정씨 정연희(1566∼1635년)등을 봉안키 위해 두원면 운곡리에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원래 1782년 태학유생 한덕보가 서재 송간을 주벽으로 하는 사우 건립을 발의한데서 비롯되어 흥양유생 신응택, 정효목 등의 노력으로 건립이 결정되었다. 10여 년이 지난 1791년 건립당시 주역이었던 정효목, 신응택의 주선으로 여산송씨, 고흥유씨, 영광정씨의 분사가 합의되었다. 정조 20년(1796) 서재 송간의 유거지인 동강면 마륜리 서대동에 운곡사 강당을 옮겨 세충사로 개칭하였다. 순조 1년(1801)송건, 송순례, 송희립을 추대하여 일문 육충사로 불리었다. 순조 33년(1833) 송상보(1564∼1597년), 송득운(1570∼1633년), 송석륭(1614∼1733년)을 추배하였고, 헌종 12년(1846) 매월당 김시습을 봉안하였다. 1848년에는 원유들의 개호상서에 의해 「서동사」로 개칭하였고, 1868년 전국 서원훼철때 「물훼(勿毁)」의 교지가 있었던 모양이나 이내 훼철되었다. 1956년 현위치에 다시 지으면서 재동서원(齋洞書院)이라 하였고 1972년에 송홍연(1569∼1629년), 송진부(1569∼1597년)를 추배하였다. 같은 경내의 창효사(1980년 건립)에는 효열을 분리하여 송석륭, 송명규, 송찬문, 송정규 등을 배향하고 있다. 신실(神室)인 서동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며,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며, 동·서재는 정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이다. 이밖에 창효사, 양평문, 내외 삼문 등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