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문화재 천년기념물 문화재

순천 낙안읍성내 동헌과관아

雲高 金容捧 2014. 9. 14. 05:54

2014년9월6일 토요일

낙안읍성 동헌은 관아 안의 객사에 버금가는 규모의 건물로 수령이 다스리는 곳이다. 감영에는 동헌대신에 선화당이 있었다. 객사의 동쪽(왼쪽)에 위치하기에 동헌이라고 추정하나 확실하지 않다. 향청이나 질청에 비하여 훨씬 크고 더 멋스럽게 치장되었다. 객사와 동헌은 외부로 나드는 문이 있어 독립적인 성격을 갖았다. 동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재판장으로서의 역할인데, 마루는 수령이 판결을 내리는 곳이었고 뜰은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공간이었다.동헌도 당호를 가지고 있는데 시정 지침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지었다. 고창은 평근당, 남원은 근민헌, 부여는 초연당, 양주는 매학당, 청풍은 금병헌, 제주는 일관헌이다. 제금당이나 청녕헌, 근민헌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였는데 충군애민하는 정신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청녕헌은 '하늘의 뜻은 맑음으로 얻고 땅의 인심은 평안으로 얻는다'라는 뜻이다. 광주의 동헌은 하모당, 곡성은 양민당, 옥과는 목애당이었다. 또한 자연의 풍광과 관련하여 이름을 짓기도 했는데 무주의 동헌은 와선당, 양주는 매학당이었다 낙안읍성 객사는 사신을 접대하는 국가 기관이다. 보통 관아 시설 안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왕이 지방 군현에 보낸 사신이나 외국 사신이 이용을 하였다. 문자적인 의미로 객사는 여관이라는 뜻도 있지만 조선에서는 왕의 궐패를 모시고 있는 시설을 가리키므로 역로에 있던 객관과는 다르다. 객사는 관아 시설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화려하였다. 또한 전망이 제일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건축의 구성이나 꾸밈에서 동헌이나 질청에 비해 훨씬 장중하고 위엄이 있는 객사는 대개 동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풍수도 가장 좋은 곳에 위치했다. 객사에는 이름 즉 당호가 있었는데 보통 그 고장의 옛이름을 따서 지었다. 예를 들어 고창은 모양지관이고 무장은 송사지관인데, 이는 모두 그 고을의 옛 이름이다.객사는 지방관이 국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곳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삭망례가 열렸다. 수령은 객사를 앞에 두고 궐패와 전패를 향하여 절을 올렸다. 즉, 멀리 서울에 있는 대궐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 형태가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조선의 중앙정부는 팔도 각 군현을 정신적으로 통제하였다. 그래서 수령은 삭망례가 있는 날에는 기생을 들이지 않았고 이를 범하면 탄핵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수령은 부임할 때나 이임을 할 때에 객사에서 예를 행하였고 출타할 때에도 예를 올렸다. 또한 암행어사와 같은 중앙관리는 객사에 머물며 지방 수령을 감찰하였다. 춘향전에서 어사또는 출두 후 객사에서 변 사또를 봉고파직하였다. 즉 객사는 지방에서 중앙정부를 상징하는 시설로 특별히 국왕이 직접 다스림을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객사는 관아 내의 다른 건물보다 중요한 건물이었기 위치나 거리를 나타낼 때 기준점이었다. 위키백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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