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문화재 천년기념물 문화재

대구 달성 육신사

雲高 金容捧 2017. 10. 9. 21:37

2017년10월8일 일요일

대구에는 묘골마을이 있다 박팽년의 직계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성촌인 묘골마을은 대구가 외지인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조선 시대의 역사유적이다 이 마을은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인 육신사(六臣祠)가 있다는 이유로 흔히 동명 대신 "육신사"로 불려진다. 육신사 경내에는 '六臣祠'라는 편액이 걸린 외삼문, 사육신만이 아니라 박팽년의 부친 중림의 위패도 함께 봉안하고 있는 까닭에 '六臣祠' 대신 '崇正祠'란 편액이 걸린 사당 건물, 박팽년의 손자 박비(뒷날 박일산으로 개명)가 1479년 지은 태고정(보물 554호), 7대손 숭고가 1644년 별당으로 건축한 충효당, 14대손 문현이 1664년 지은 도곡재(대구시 유형문화재 49호), 제사 때 쓰는 제기를 보관하고 임시숙소로 사용하기도 하는 숭절당, 그리고 2010년에 문을 연 사육신기념관 등이 당당한 모습으로 웅거하고 있다 단종 복위를 기도하였다가 실패한 뒤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육신의 직계 존비속 남자들은 모두 목을 졸라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그나마 여자 가족들은 겨우 목숨만은 부지하지만 하루아침에 노비로 전락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직계 아들이나 손자가 죽지 않고 살아난 예외가 있으니 그가 바로 박팽년이다 박팽년의 둘째며느리인 성주 이씨는 단종 복위 운동으로 시아버지인 박팽년과 남편 박순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 대구에서 관비 생활을 했다. 당시 그녀는 아들이면 태어난 즉시 죽임을 당하고 딸이면 관비가 될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다. 얼마 뒤 출산을 했는데 아들이었다. 이 소식이 관으로 들어가면 아기는 바로 죽을 운명이었다 이때 며느리 이씨의 여종도 함께 따라와 있었다. 마침 그녀도 임신 중이었다. 출산 시기도 차이가 거의 없었다. 여종은 딸을 낳았다. 그녀가 며느리 이씨에게 말했다 제가 아들을 낳고, 마님께서 딸을 낳은 것으로 해야겠습니다. 제 딸은 어차피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평생을 관비로 지낼 신세이지만, 마님의 귀한 아드님은 생명을 지킬 수 있지 않습니까 여종의 아들이 된 박팽년의 손자는 그렇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여종은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로 숨어들어 '아들'을 키우며 살았다. 이름도 그냥 '박비'라 했다. 노비에 무슨 성씨가 있을까 싶어 사람들은 박비 두 글자를 아이의 이름으로만 여겼다. 박비의 뒷글자 '비'는 노비를 나타내는 것이었지만, 앞글자 '박'이 박팽년의 손자라는 사실을 은근히 내포하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다만 '어머니'인 여종이 알았고, 가까운 인척 중 몇이 숨을 죽이며 그 사실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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