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성(邑城) 산성(山城))

구미 금오산성

雲高 金容捧 2016. 11. 22. 04:36

2016년11월20일 일요일

금오산성은 고려 후기 금오산에 축조한 이중의 석축 산성으로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를 둘러싼 내성()과 북쪽의 계곡을 두른 외성()의 이중으로 된 석축산성()이다. 금오산의 절벽과 급경사를 이룬 정상부와 북향의 교각능선()을 이용하여 포곡식()으로 구축되어 있다. 내성은 산의 윗부분에 둘레가 10리나 되도록 쌓았는데, 절벽이 험한 곳은 천연의 성벽을 이루고 있으므로 따로 쌓지 않았다 외성은 계곡을 감싸고 있는데 둘레가 5리나 되며 내·외 성벽의 길이는 6.3㎞ 정도 된다. 북쪽 외성에는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계단식의 높은 기단이 구축되어 있다. 정상에서 동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길이 약 450m, 폭 8~18m 되는 돌출 성곽이 있고 북쪽 외성 끝부분에도 짧은 돌출 성곽이 있다. 규모는 외성이 길이 약 3,700m, 내성이 2,700m이며 성벽의 높이는 지세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북문 근방은 약 3m, 험준한 절벽은 1m 정도이다 외성은 해발 약 350m에 위치하여 금오산 입구와 대혜폭포를 연결하는 케이블카 노선 중간 지점에 있으며, 내성은 해발 약 850m의 성안 분지를 둘러싼 능선에 있다 처음 쌓은 연대가 문헌상에 있지 않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 후기 왜구들이 내륙 깊숙이까지 빈번히 쳐들어와 인명을 살상하고 노략질을 일삼자, 인근 선산·인동·개령·성주 백성들이 금오산()에 피난하여 왜구들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고 군병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두었던 군창까지 두었다고 한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수축()이 이루어졌는데, 『태종실록(錄)』에 1410년(태종 10)에 수축했다고 기록된 것이 있고, 『경상도속찬지리지()』 선산부조()에 1413년(태종 13)에 수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180여 년간 문헌상 기록이 없어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4년 뒤인 1595년(선조 28) 금오산성과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을 만들어야 할 것을 청하였고, 11월 도체찰사(使) 이원익()이 비변사에서 “산성에 들어가 지키게 하되 금오·천생·부산()·악견()·공산()·용기산성()을 먼저 지킬 것이고, 화왕산성()을 급히 보수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선조는 도체찰사 이원익과 각 도 감사()에게 이 뜻을 알리고 산성을 지키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