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사찰

강화 전등사

雲高 金容捧 2015. 4. 23. 08:26

2015년4월18일 토요일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鼎足山城) 내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고 했다고 하나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그 뒤 1266년(원종 7) 중창하였고,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1282년(충렬왕 8)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옥등(玉燈)을 시주했으므로 절이름을 전등사로 고쳤다 한다. 그러나 현재 그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그 뒤 1337년(충숙왕 복위 6)과 1341년(충혜왕 복위 2)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였다. 1605년(선조 38)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 버렸고, 1613년(광해군 5)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해서 1625년(인조 3)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1678년(숙종 4)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으며, 1707년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다. 1719년 이 절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1726년(영조 2)영조가 이곳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題額)을 써 주고 고쳐 걸게 하였으며, 1734년 곡식 수십 석을 하사하였다.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重修佛事)가 당시의 총섭 초충(楚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에 쓰인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가 시주한 것이며, 이때 대조루(對潮樓)도 함께 건립되었다. 또한, 1761년 대연(大演)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改金)하였다.1784년(정조 8) 정족창(鼎足倉)이 세워졌는데, 규모가 4, 5칸에 불과했으나, 1828년(순조 28) 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施設節目)까지 마련되었다.1839년(헌종 5) 서룡(瑞龍)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十王殿)을 수리하고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841년연홍(演弘) 등이 대조루를 중건하였고, 1855년(철종 6)규영(奎營) 등이 대웅전을 중수했으나 이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1871년(고종 8) 포량고(砲糧庫)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僧軍)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진상약애고(進上藥艾庫)와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를 절 남쪽에 건설하였다.1876년에는 효월(孝月)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1884년 3월영담(映潭)이 관음암(觀音庵)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七星幀)을 개금불사(改金佛事)하였다.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史庫藏本)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韓永福)이 이 절에 전래되어 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宮內府)에 바치고, 중수비 200원(圓)을 받아 절에 내렸다.1912년 조선불교 30본산(本山)의 하나로 강화·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지는 김지순(金之淳)이었고, 2대 주지는 국창환(鞠昌煥)이었다.1915년국창환은 국고보조를 얻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8대 주지 김정섭(金正燮)은 1934년 전문강원(專門講院)을 설립하고 안진호(安震湖)에게 부탁하여 사료를 모아 《전등본말사지 傳燈本末寺誌》를 편찬, 발행하였다.1973년에 적묵당을 해체·복원했으며, 1977년 명부전을 해체해서 이전하고 종각을 신축하였다. 1979년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1986년에 극락암과 삼성각을 해체 및 증·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대웅보전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석가·아미타·약사 여래의 삼불과 1916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한 《법화경 法華經》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裸女像)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한국민족대백과인용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전국 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천 수도암  (0) 2015.04.27
김천 청암사  (0) 2015.04.27
강화 석모도 보문사  (0) 2015.04.22
화성 용주사  (0) 2015.04.20
화순 운주사 천불 천탑  (0) 2015.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