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3월23일 월요일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국보 제9호로 이 석탑은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飜案)이라고 하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1962년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고, 1981년에는 이 사지에 대한 전면발굴이 이루어져서 석탑 주변도 조사되었다.석탑의 주변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가람배치의 전모가 밝혀졌고, 일찍이 석탑 주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태평8년무진정림사)’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초기에는 정림사라고 불렀던 것이 확실히 밝혀져, 그 뒤 이 석탑의 명칭을 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평 8년은 1028년(현종 19)으로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던 해로 생각된다.이 석탑의 높이는 8.33m이며, 석탑의 구조는 일반적인 건축이나 석탑에서와 같이 지대석(地臺石)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相輪部)를 형성하였다.기단부는 8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8매의 낮은 돌을 놓은 다음 양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1탱주, 면석이 16매로 조립되어 있는 중석을 놓았다. 중석 위에 갑석(甲石)은 8매로 구성되었으며 두껍다. 상부면은 약간의 경사가 있도록 하여 낙수면을 이루게 하였으며 탑신부를 받는 받침 없이 평평한 갑석 위에 탑신을 놓았다.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108개나 되는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층의 조립형식은 같다. 초층탑신은 규격이 크기 때문에 12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네 귀퉁이에 배흘림이 있는 우주석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 면은 2매씩의 긴 판석을 끼웠다. 2층 이상의 탑신에 있어서는 2, 3층은 4매, 4층은 2매, 5층은 1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다.각 층의 양쪽 우주에는 역시 배흘림이 표현되었으나 초층에 비하여 2층 이상 탑신의 높이가 급격히 체감되어 아주 낮아졌기 때문에 우주도 짧아서 배흘림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된 탑신석 전체에 비하여 우주의 폭이 넓은 점이 눈에 띈다.옥개석 하면의 받침부는 4매의 각형 판석을 아래에, 그 위에 다시 8매의 각을 죽인 모죽임형 판석을 얹은 2단으로 미륵사지석탑에서 보이는 창방, 평방, 포벽 등의 석재가 없고 목조건축의 공포 부분을 간략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모전석탑(模塼石塔)에서 시작된 신라의 석탑 역시 목조건축의 공포 부분을 간략화하여 지붕 아래를 내어쌓기로 하여 옥개 받침을 표현하였고, 통일신라 감은사지삼층석탑에 이르면 각형의 5단 층급받침 형태로 옥개받침이 정형화되고 낙수면은 지붕모양으로 경사를 나타나게 하였다.상륜부는 현재 5층옥개석 위에 거의 원추형에 가까운 노반석(露盤石) 하나가 있을 뿐 다른 부재가 없으며, 찰주공(擦柱孔)은 노반을 관통하여 그 밑의 옥개석 중심부에까지 패어 있다.1963년 조사에서 4층 탑신 남면에 두께 13cm의 판석으로 가린 사리공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사리장치는 발견되지 않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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