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 한옥(韓屋)

창녕 영산 신씨 고가 1호

雲高 金容捧 2014. 10. 18. 08:21

2014년10월8일 수요일

창녕군 영산면 교리93번지 영산 신씨고가 1호는 경상남도 문화재 제109호로 지정 되여 있으며 현제 소유권은 창녕군으로 넘어가 관리 보존 중이다 영산 신씨의 유래는 아래와 같다 영산(靈山)ㆍ영월신씨(寧越辛氏) 고려말 홍건적의 신부(辛富)ㆍ신 (辛珣) 충신을 배출했다. 또한 문신으로는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 개척자 사람인 신천() 빼어났다.()천은 ( ) 문인으로 사상최초의 서원(書院) 세웠으며 동국공맹(東國孔孟) 학자 17 중의 하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지낸 신식(辛息),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신을화(辛乙和)등도 돋보이는 이름.문무(文武) 출중한 인재를 수없이 배출한 영ㆍ영신(靈ㆍ寧辛)씨는 여말(麗末) 풍운의 정치승려 신돈(辛旽) 낳는다. 그는 공민왕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 정치, 종교의 대권을 장악했다. 공민왕 15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설치 자신이 판사(判事) 취임해 문란한 토지제도를 개혁, 농민의 권익옹호와 국가재정의 충실을 꾀했다. 그러나 끝내 권력남용으로 인망을 잃고 역사에 부정적 인물로 기록됐다.조선조에 들어 () 인물로는 태종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지낸 신균(辛均) 정용호(精勇護軍)으로 25차레나 왜구(倭寇) 싸운 문장 신유정(辛有定) 이름을 드러냈다. 신유정(辛有定) 태종 3 강원도(江原道)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의주도병마사(義州都馬使), 평안도도안무사(平安道都安撫使) 지냈다.학문을 좋아했던 세종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신석조(辛碩祖) 집현전(集賢殿)학사에 등용됐다. 그는 학문과 문장에 능해세종실록(世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의방유취(醫方類聚)’등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같은 시대의 신인손(辛引孫) 사관(史官)으로 여러 대군(大君)들과 서사(書史) 강론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그는 형조판서(刑曹判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신영희(辛永禧) 김종직(金宗直) 문인(文人)으로 과거(科擧) 급제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남효온(南孝溫) 홍유손(洪裕孫)등과 죽림(竹林) 벗이 되어 학문에 정진 문명(文名) 크게 떨쳤다. 밖에도 조선조에 문신으로 활약한 (영ㆍ영신씨)(靈ㆍ寧辛氏) 명종때의 신륜(辛崙) 신응시(辛應時) 선조때의 신경진(辛慶晋) 광해군때의 신광업(辛光業) 신경연(辛景衍)등이 있고 신계영(辛啓榮) 외교관으로 뛰어난 솜씨를 보여 인조 2 임란(壬亂) 포로로 일본(日本) 붙잡혀간 146명의 동포를 데려오기도 했다. 그는 인조 17 볼모로 잡혀갔던 세자를 맞으러 심양(瀋陽) 갔으며 효종 3년에는 사은부사(謝恩副使) 청국(淸國) 다녀오기도 했다.(영ㆍ영신씨)(靈ㆍ寧辛氏) 애국 충절은 일제(日帝)하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돼 신일용(辛日鎔)ㆍ신태악(辛泰嶽)ㆍ신공제(辛公濟) 신영락(辛泳洛) 등의 애국지사를 배출해 냈다.신태악(辛泰嶽) 이승만(李承晩)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신공제(辛公濟) 3 1운동 일경(日警) 쫓겨 중국(中國)으로 망명했고 신영락(辛泳洛) 3 1운동 당시 경남 창녕(昌寧)에서 결사대를 조직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최근 인물로는 전국회의원 신기남, 신기하, 신도환, 극작가 신봉승 등등이 있다.당대의 재력가 롯데그룹 회장 신격호 (경남 울주가 고향)도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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