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사찰

창녕 영산 태자사

雲高 金容捧 2014. 10. 14. 06:16

2014년10월8일 수요일

옛말에 “태자봉에 묘를 들이면 비가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간혹 문제가 일어나고 난동이 벌어지기까지 한다. 영산사람들은 날씨가 좀 가물고 비가 안와서 기다려지면 “또 어느놈이 태자봉에다 묘를 썻구먼”다른 곳에는 비가 왔는데 우리 영산만 가물단 말이야“하고 공논이 일기 시작한다. 그러다가도 다시 가뭄이 계속된다면 농민들이 작당을 해서 태자봉을 샅샅히 뒤져 은장(숨겨진무덤)을 찾아내는데, 번번히 헛됨이 없이 태자봉 곳곳에 평장한 해골 두 세구쯤 파내기가 일쑤였겠다. 그때 아니나 다를까 소나기라도 한줄 떨어지면 ” 보라고! 태자봉 은장을 파내고 나면 당장비가 오지 않는가!“ 하고 태자봉을 영험 있는 명당으로 소문이나 전고을로 멀리 멀리 퍼져나간 것이다. 창녕의 설화편”에는 태자봉 설화를 증명하듯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에 실제로 일어났다고 하는 사건을 이렇게 적고 있다. 창녕의 설화편”에는 태자봉 설화를 증명하듯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에 실제로 일어났다고 하는 사건을 이렇게 적고 있다. 당시 큰 가뭄이 2년째 들어 농사를 망치니 민심이 흉흉하기 짝이 없었던 지라 8월 16일(영산장날)을 기하여 영산사람들과 이웃고을 사람들까지 수만명이 조직적으로 모여 태자봉은장을 모조리 파내서 몇구의 해골을 묶어들고 함성을 지르고 있을때 남쪽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과 함께 비가 내리니 수만 관중들은 환호를 올리며 춤을 추니 일대장관이라 희우제전이 3일동안 벌어졌는데 성내리 동사에는 백골곤욕의 참상을 보았다고 했다. 경남도지 행정조에 신라때부터 고려말까지 중앙과 지방호족의 세력이 대등하여 서로 호혜관계에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음을 볼때 어찌 신라의 태자를 가야지역인 영산에 매장하였을까? 영산지역도 대등한 고대 성읍국이었슴에 엄연히 성주(王)가 있었을 것이라고 조선 성종때 노사신이 지은 동국여지승람영산조에 『在竺山下有新羅太子墓云故之名』이라 기록되어 있으니 태자산서편 수문이골에서 영산읍성의 최고봉을 에워 흐르는 내천을 따라 태자봉에 오르는 입구에 다다르면 그 옛날 성안으로 물을 끌어들여는 수구시설이 아직도 확연히 남아 있고 영축산 상봉으로 머리를 들어 올라보면 가파른 시맨트 포장길을 따라 숨 가프게 올라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태자봉공원(太子峯公園)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으로 묘역을 석축으로 3단으로 조성해 놓았다. 상단의 바로 뒤쪽에 읍성 최북단의 성터가 무너진채로 남아 있고, 정남향의 태자사당이 98년도에 새로 건립된 듯 서 있다. 사당 안에는 가운데에 성황당제단(城皇堂祭壇)이라 음각된 조그만 흑색의 돌비석 신주가 세워져있고 좌측으로 주상산령지위(主上山靈之位)라 새겨진 성황신주석보다 약간 작은 신주석이 서있다. 그러나 정작 사당의 주인격인 태자의 신주는 없다.어찌하여서 일까? 동국여지승람에는 분명히 신라태자묘라 적고 있지 않는가! 주위를 둘러보아도 태자묘는 보이지 않는다. 약 8년 전 태자봉을 지을 때 쌓은 3단 석축과 계단만이 덩굴잡초에 덥혀 있고 한 켠에 영산읍성 안내판(향토문화재 20호)만이 홀로 서있다. 당시 묘역정비공사를 할 때 제단가운데쯤 지하 1M아래 바닥에는 옥색 빛이 나는 모래층이 두텁게 깔려 있었다고 하니 성읍국시대 태자묘역을 조영할 때 용상(龍床)에 오르지 못한 태자의 혼백을 더욱 신성시하여 성역을 만든 것일까? 일제시대 이 지역을 답사한 일본인 고고학자 今西龍 이마니시류의 보고서에 의하면 “태자묘는 봉토를 유실하고 묘광(墓壙)도 그 절반이 없어지고 후반만 남아있어 묘광내 출입이 용이한데 남에서 동으로 약 20도로 향하여 측벽과 오벽을 야석(野石)을 쌓아 조잡하고 8자 1치 크기의 개석 4개가 남아 있었으며, 도굴한 흔적이 있다 라고 되어 있었으니 태자께서 사후에도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도록 영산마을을 내려다 보이도록 묘실을 조성한 것이 아닌가! 일찍이 영남에 철기문명을 부흥시킨 삼한시대 기름진 낙동강역에 불사국(不斯國)을 일으킨 비화가야인들은 영산현의 서쪽 28리 기음강(技音江) 가야진(伽倻津)을 통해 인근의 가야국과 토기, 철기, 농기구 등 상업무역을 활발히 하면서 영산동리 영산고분군과 도천리 석천산기슭사이 넓은 평야지에 셔불(西火의 우리말 표기)이란 큰 상업도시를 형성하고 넉넉한 삶을 이어 찬란했던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 갔으리라

셔불 西火 수호신守護神이 된 영축산 太子峯의 太子墓|작성자 하강돈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전국 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순 쌍봉사  (0) 2014.12.27
창녕 관룡사  (0) 2014.10.18
창녕 창화사  (0) 2014.10.12
강진 용문사  (0) 2014.10.10
강진 옥련사  (0) 2014.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