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서원(書院)

해남읍 미암서원

雲高 金容捧 2014. 3. 12. 05:46

2014년3월10일 월요일

미암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해 사림들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이었다.또한 향촌 자치운영기구의 기능도 한 서원이 사우와 함께 우리지역에도 22여 개가 관리되고 있다.지역의 인재를 키우고 유교적 향촌질서를 유지한 사림들의 공론을 형성하는 구실을 하는 등 긍정적 기능도 발휘했던 서원, 우리지역의 22개에 달하는 서원과 사우에 대해 알아보자.해촌서원은 당초는 해남읍 구교리에 위치한 석천사로 1652년에 창건한 임억령 단독 사우였다.1689년(숙종15)에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을 합설하여 삼현사라 하다가 그 뒤 1721년(경종1)에 귤정 윤구와 고산 윤선도를 추배하여 오현사가 되었다.1868년(고종5) 미사액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었다가 1901년(광무5)에 사무를 다시 세우는 대신 단을 만들어 제향을 이어나갔다.그 후 1922년에 취죽헌 박백응을 추배하고 사우를 신축하여 유지해 오다가 1991년에 현 위치인 해남읍 해리 금강곡에 이설 현재에 이르고 있다.내삼문과 담장 안에 있는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사우의 좌측에 고직사 1동이 있다.해촌사에 모셔진 해남 출신의 유현들은 고산 윤선도(1587~1671)를 제외하면 거의 동시대 인물들이다.금남 최부(1454~1504)는 충의, 석천 임억령(1496~1568) 은 풍채, 미암 유희춘(1513~1577)은 경술, 귤정 윤구(1495~1554)는 문장, 고산 윤선도는 충헌으로 각각 칭송되어 온다.최부(1454~1504)의 자는 연연, 호는 금남, 탐진인(나주)이다. 점필재 김종직에 수학, 진사 천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고 문과중시에 을과 등제 하였으며,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을 저술하였고 참여교리를 지냈다.제주추쇄경차관으로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귀향도중 풍랑으로 중국 절강성에 표류 반년 만에 귀국하여 성종의 지시로 표해록을 지었다. 그 뒤 사간을 지내고 무오사화에 단천에 귀양, 갑자사화에 참형을 당했다. 추증 도승지, 저서에 금남집이 있다.윤구(1495~ ? )의 자는 형중, 호는 귤정, 해남인이다.생원시 및 식년문과 병과급제, 사가독서를 한 후 주서를 배하다 홍문관교리가 되었으나 기묘사화로 삭직되고 영암으로 유배된 후 복직 성균사성을 제수하였으나 불취하고 위의 제발상론과 사호우익태자론을 저술하였으며 귤정집이 있다.임억령(1496~1568)의 자는 대수, 호는 석천, 선산인이다.조선 명종 때 문신 눌재 박상의 문인, 진사시 및 식년문과 병과 급제 후 왕세자시강원문학 삼례찰방 동복현감 영광군수 수찬 교리 사헌부지평 사간원사간 대사간 동부승지 병조참지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이때 관동팔경, 청허루, 서한진, 오대산, 죽서루, 비선정, 삼일포, 금강산, 청간정, 총석대, 소양정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담양부사로서 옥과현감을 겸직하다 벼슬을 버리고 성산의 승경에 귀의하였다.서하당을 건축하고 사위인 인재 김성원에게 정자를 짓게 하고, 송강 정철, 재봉 고경명, 인재 김성원, 송천 양응정, 옥봉 백광훈, 백호 임제, 고죽 최경창 등의 제자를 길렀다.이후 강진, 성산, 해남을 오가며 여생을 학문 수양과 제자를 기르며 보냈다. 또 제백령이 소육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선비들을 추방하는 사화를 주도함에 이를 사전에 알고 말리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하향했다. <“好在漢江水 / 安流莫起波 / 孤舟宜早泊 / 風浪夜應多”> 저서에 석천집이 있다.유희춘(1513-1577)은 선산인으로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 시는 문절, 김모제의 문인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으로 있다가 을사무옥사건 즉 양재역벽보사건에 연루되어 제주, 종성, 은진 등에서 1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경사에 밝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많은 제자를 배출시켰다.귀양이 풀리게 되어 자헌으로 부제학에 올랐으며 이후 대사간, 관찰사, 이조참판을 지냈다. 저서로 미암일기, 속휘변, 주자어류잔해, 시서석의, 헌근록, 역대요의, 강목고의, 국조유선록이 있다.윤선도(1587-1671)는 해남인으로 자는 약이, 호는 고산·해옹, 시는 충헌이다. 서기 1616년 별시문과에 급제했고 경사백가는 물론 의약, 복무, 음양, 지리에 정통하였다.이이첨의 실정과 영의정 박승종 및 왕비의 형 유희분의 망군부국의 죄를 규탄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경원에 유배,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의금부도사를 불취하고 별시문과초시에 장원하여 왕자사부가 되고 이어 호조정랑 한성부서윤을 하였고, 증광에 병과로 급제 시강원문학이 되었으나 강석기의 모함으로 성산현감에 좌천되었다.그 후 첨지중추부사 공조참의동부승지를 하고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의 기년설을 반대 삼년상을 주장하다가 송시열, 송준길의 반대로 개복되고 삼수에 위리안치 되었다.그 후 광양이배 후 특사되었다. 작품으로 산중신곡, 어부사시사, 저서로 고산유고가 있다.박백응은 무안인으로 호는 취죽헌이며 중종 20년 을유생(1525)이다.내구(외삼촌) 엄석천의 문하에서 수업, 사마시에 합격한 후 진취의 뜻을 두지 아니하고 학문에 전심하여 마침내 대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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