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3월17일 일요일
♣강화도령 이원범이 철종이 되기까지의 역사적 사연을 첨부한다 철종(본명이 이원범)은 고조부가 영조, 증조부가 사도세자였다.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언군(이인)의 아들 이광(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3남으로,
아버지가 모반 사건에 휘말려 가족 모두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순조의 양자가 돼 헌종에 이어 철종으로 등극한다.
한성의 반가에서는 그를 비꼬아서 강화도령이라고 불렀다. 은언군은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출궁되어 제주도 유배 뒤 복권돼 한양으로 왔으나
역모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되어 탈출하려다가 체포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신유사옥)가 일어나자 그의 처와 며느리가 천주교를 신봉하여
청나라에서 건너온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이에
은언군도 가족이 천주교에 빠지도록 방치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탄핵되었으며 마침내 사약을 받는다.
부모와
장형, 누이가 잇달아 사망하는 불우한 가족사를 겪은 이광(李壙)은 유배지 강화도에서 곤궁한 생활을 보내다 1841년
사망하였다.
1844년 큰아들 이원경은 민진용(閔晉鏞)에 의해 왕위에 추대하려는 모반 사건에 휘말려 사사되었고
일가는 모두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강화도로 이배되어 살게되었다.
3남
이원범은 산에서 나무를 하며 행상을 하거나 농부으로 살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기에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순조의 비, 본관은 안동, 영안부원군 조순祖淳의 딸)에 의해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라 1851년(철종 2)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비로 맞아들임으로써
순원왕후 수렴청정 하에 안동김씨의 세도가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
삼정의
문란(三政紊亂)으로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세 가지 재정 행정을 둘러싼 정치 부패가 심해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난다.
철종은
세도정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강화도에 살 때 혼인을 약속한 양순(또는 분이)이라는 처녀를 그리워하다,
술과 궁녀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 33세에 후사없이 하직한다. 1857년(철종 8) 순원왕후가 죽자,
안동김씨와 반목하던 조대비(풍양 조씨, 신정왕후神貞王后, 순조의 세자인 익종翼宗의 비)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죽은 후, 조대비는 이하응(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이희,이명복)을 양자로 맞아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고종이다.
조대비는 고종을 보잘 것 없는 여흥 민씨 자영과 혼인시켜 그간의 세도가들의 전횡을 일소하려고 하지만
결국 민씨 세도정치기를 거치며 오비이락으로 조선왕조는 황후와 황제의 비극적 죽음과 함께 나라에 한을 남기고 폭싹 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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