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충청감영복원지(선화당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92호 93호)
2015년3월23일 월요일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충청감영지는 1603년에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설치된
충청도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관청으로 공주 지역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1603년(선조 36)에 공주 지역에 설치되어, 1932년 대전
지역으로 충청남도 도청이 이전될 때까지 있었다. 현존하는 많은 조선 후기의 문서들은 조선시대 충청감영으로의 공주 지역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유적에 대한 훼손 탓에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지만, 충청감영의 정문이었던 포정사 문루, 금남루 사진, 충청남도 도청과 관련한 사진, 신사 관련 사진,
공주여자고등학교 관련 사진 등이
남아있다.감영은 각도의 관찰사가 근무를 하던 곳으로 충청감영은 본래 청주 지역에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1603년(선조 36)
공주 지역으로 옮겨졌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서울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공주 지역이 재인식되었기 때문이다.공주 지역은 그 지형과 지세가
북으로는 차령산맥과 금강이 가로막고, 남으로는 계룡산을 비롯하여 시가지 주변을
300m 정도의 고지가 둘러쌓은 천연의 요새지로서 서울과 호남 지역을 잇는 가장 가까운 육로에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청주보다는 공주가 충청도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조선시대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 지역의 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는 오늘날의 군지, 시지,
마을지와 같은 지리지류가 있다. 관찬(官撰) 지리지로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동여도지(東輿圖志)』,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大東地志)』,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읍지(忠淸道邑地)』 등이 있고, 공주 지역에 관한 사찬(私撰) 지리지는 『공산지(公山誌)』가 있다.지리지는 공주의 연혁, 행정 구역, 인구, 지리
환경, 주요 시설물, 토지 이용, 관리 구성 등 일반 현황에서부터 공주의 풍속, 공주의 성씨, 공주의 인물에 대한 기록까지 여러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공주 지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가 있는데, 지도는 지리지에 포함된 것과 국가에서 전국의 지도를
제작하면서 만들어진 지도가 있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대부분 18세기 이후의 것들이다.감영에서는 수많은 종류의 공문서가 만들어졌는데, 그중에서
현존하는 것은 공주 지역의 충청감영 개영 후의 것인 조선 후기
문서가 대부분이다. 공문서는 작성한 주체와 작성 목록에 따라 수많은 종류가 전하는데, 다음 같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각 군현의
수령이 관찰사에게 보고한 첩보류로 『기양문첩(岐陽文牒)』이 있고, 관찰사가 조정에 올린 문서인
『금영계록(錦營啓錄)』·『충청도관찰사장계(忠淸道觀察使狀啓)』, 감영의 운영과 군사 조직 세금 수취 등의 관련 문서인
『충청감영군수소용별록성책(忠淸監營軍需所用別錄成冊)』·『충청감영군수소용성책(忠淸監營軍需所用成冊)』·『충청감영속쌍수산성편오군총성책(忠淸監營屬雙樹山城編伍軍摠成冊)』
등이 있다.또한, 도내 제반 현황을 파악하는
『금영총록(錦營摠錄)』·『호서감영일기(湖西監營日記)』·『금영공안(錦營公案)』·『호서감영각고중기(湖西監營各庫重記)』·『호서감영미포중기(湖西監營米布重記)』
등이 있고, 조정에서 내린 문서인
『유호서대소민인등윤음(諭湖西大小民人等綸音)』·『유경기홍충도감사수령등윤음(諭京畿洪忠道監司守令等綸音)』·『포폄목(褒貶目)』 등이 있다.그밖에 백성이
충청감영에 올린 소지(所志)도 많이
남아있는데, 공주 사람 박성필이 올린 소지와 공주최씨 집안의 노비 손순의 소지가 도정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충청감영에서 일반 백성에게 발급한
문서로 완문(完文)류의 문서가 흔하게 발견되는데, 이것은 일종의 증명서와 같은 내용이라 할 수 있다.네이버지식백과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