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척화비
2014년10월8일 수요일
척화비(斥和碑)는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하여 종로 네거리를 위시한 전국 교통 요충지 200여 개소에 세운 비석(碑石)이다. 1871년(고종 8)에 화강석으로, 높이 4자 5치, 너비 1자 5치, 두께 8치 5푼이 되게 만들어 세었다.1863년 조선 고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에 봉해지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가 집권할 당시 국제 정세는 열강의 제국주의 확장으로 인해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미국, 러시아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반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에 몰려와 통상을 요구했으며, 때에 따라 무력 도발 및 시위를 자행하기도 하였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집권 초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병인양요(1866년; 고종 3년)의 발생과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년) 이후 ‘수교통상반대’로 정책 기조를 급선회했다. 특히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조선왕조 질서 유지를 위하여 외국과 수교와 통상을 금하는 쇄국정책을 세웠고, 이를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음력 4월에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 200여 곳에 척화비를 세웠다.그 후 1882년(고종 19년 :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대부분 철거되고, 조선은 각국과 교통하게 되었다. 그 중 서울에 세웠던 것은 1882년 음력 8월 15일에 종로 보신각(普信閣) 부근에 파묻었다. 이것이 1915년 6월 보신각을 옮겨 세울 때 발견되어 경복궁 근정전 서쪽 화랑에 진열되었다.척화비에는 주문(主文)으로 다음 문구가 적혀 있다.洋夷侵犯非戰則 和主和賣國 (독음:양이침범비전즉 화주화매국)그 다음 작은 글자로 비의 옆면에 다음 문구가 적혀 있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독음: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이 뜻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이다.이 밖에 경기도 강화도, 경상도 동래군·함양군·부산진·경주 등 30여 곳에 남아 있다. 위키백과에서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