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성(邑城) 산성(山城))

순천 낙안읍성

雲高 金容捧 2014. 9. 14. 15:58

2014년9월6일 토요일

순천 낙안읍성(順天 樂安邑城)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조선시대읍성이다. 1983년 6월 14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다 낙안(樂安)은 백제(百濟)때부터 읍치(邑治)가 있었다고 하며, 고려말(高麗末)에는 왜구(倭寇)의 피해로부터 주민(住民)을 입보(入保)시키기 위하여 토축(土築)의 읍성(邑城)이 축조(築造)되었다. 1397년(태조(太祖) 6)에 김★길(金★吉)이 백성을 동원하여 토성(土城)을 쌓은 것이 현재 낙안읍성(樂安邑城)의 전신(前身)이 되며, 세종대(世宗代)에는 둘레 592보(步)의 석축(石築)으로 읍성(邑城)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토축성(土築城)의 석축화(石築化)는 조선초기(朝鮮初期)의 전반적(全般的)인 추세였으며, 왜구(倭寇)가 예상되는 남해안지역의 읍성(邑城)이 맨 먼저 석축화(石築化)되었다. 이어서 세종(世宗)·문종대(文宗代)에 이르러 읍성(邑城)의 방어력(防禦力)을 높이는 국가적(國家的) 규모(規模)의 계획이 실천에 옮겨지게 되었는데, 문종원년(文宗元年) 8월(八月)의 기록에 낙안읍성(樂安邑城)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둘레가 2,865척(尺)이고 성벽의 높이는 평지(平地)에서는 9척(尺)5촌(寸)이었고, 지형이 높은 곳에서는 8척(尺)5촌(寸)이었다. 그 위에 여장(女墻)의 높이가 2척(尺)5촌(寸)이 더하였고, 적대(敵臺)(치성(雉城))는 12개가 계획되어 4개만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성문은 3군데인데 옹성(擁城)이 없었으며 성안에는 우물 두 곳과 작은 못 2개가 있고, 성벽 둘레의 해자(垓字)는 아직 시설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고을의 진산(鎭山)인 금전산(金錢山)의 남쪽으로 낮아진 구릉에 동(東)·서(西)로 길다란 말각장방형(抹角長方形)을 이루고 있는 성벽은 성돌의 축조방법이 전형적(典型的)인 조선초기의 읍성형식(邑城形式)을 취하고 있다. 성밖에는 동천(東川)과 서천(西川)이 자연해자(自然垓字)를 형성하고 있으며, 성벽은 높이 4m 쯤이고 두께 3∼4m인데 아랫부분의 폭은 7∼8m이다. 성벽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오르면서 석재(石材)가 차츰 작아지고 기울기를 주어 쌓았고, 안쪽에서 성벽 위로 오르는 계단 모양의 좁은 통로도 만들어져 있어 세종대(世宗代)에 새로 규정한 「축성신도(築城新圖)」의 규식과 매우 흡사한 것이다. 이 성에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임경업장군(林慶業將軍)이 쌓았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오고 있다. 당초 성문은 남문에 쌍청루(雙淸樓)가 있고, 동(東)·서문(西門)에도 문루(門樓)가 있었으나 19세기(世紀)에 이르러 남문(南門)은 진남루(鎭南樓)라 하고 동문루(東門樓)는 낙풍루(樂豊樓), 서문루(西門樓)는 낙추문(樂秋門)이라 하였는데, 남(南)·동문루(東門樓)는 이층(二層)이었다. 이밖에 적대(敵臺)(치성(雉城))는 6개가 있었다고 하며 주로 동문방향(東門方向)에 배치되고, 문(門)에는 옹성(擁城)이 있었다. 남문 서쪽에 수구(水口)가 남아있고 치성(雉城)은 7m 크기의 방형(方形)이어서 조선시대 읍성연구(邑城硏究)의 귀중한 자료(資料)가 된다. 성내(城內)에는 객사(客舍)·임경업장군비각(林慶業將軍碑閣)과 중요민속자료(重要民俗資料)로 지정된 민가(民家) 9동(棟)이 있고, 또한 전통적(傳統的)인 가옥과 옛 건물터가 남아있어 고풍(古風)을 간직한 가장 전형적인 고장으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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