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고분 옥봉과 수정봉
2014년5월27일 화요일
진주시 옥봉남동 산 456번지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인 진주 옥봉 고분군 발굴 유물도 일제 때인 1910년경 반출돼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진주 향교 맞은 편에 남북 두개의 봉우리를 가진 독립 구릉이 있는데, 이 중 남봉은 해발 64.7m, 북봉은 해발 92.3m이며, 이 봉우리를 일반적으로 수정봉·옥봉으로 부르고 있다. 옥봉 고분군은 이 구릉의 정상부인 두 봉우리 사이에 7기의 봉토분이 군을 이루며 분포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집이 빈틈없이 들어 서 있거나 경작지로 바뀌고 진주 고분군이란 이름으로 수정봉 3호분으로 추정되는 고분만이 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이 고분군은 1910년 일본인 학자 관야정(關野貞 세키노 타다시)에 의하여 발굴조사 되었다. 경남일보 1910년 11월 2일(수요일)자 2면 '수문쇄록'에 1910년 당시 발굴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진주시 옥봉(일명 수정봉)위에는 여러 개의 옛 무덤이 있는데 높이는 5-6척, 둘레는 10여 걸음쯤 되는 큰 무덤으로 어느시대 누구의 무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금년 여름에 어떤 사람들이 발굴했는데, 그 가운데서 기이한 유물등이 다수 발굴 되어, 그 당시 본보에 알렸거니와 또 다수의 고분이 있었는데, 그저께 진주에 있는 경남 도청에서 나머지 고분 두 곳을 발굴해 보니 또 기이한 고기물 등이 많이 출토돼 도청에서는 전문가와 관련 박사들에게 감정을 맡겨놓았다더라이 기사를 보면, 1910년 여름에 높이 5~6척 되는 큰 무덤을 어떤 사람이 발굴을 먼저했고, 11월 들어 도청에서 2곳을 발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당시 3기의 고분을 발굴한 것이다. 이때 발굴된 유물들에 대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것이 수정봉(水精峰) 2, 3호분과 옥봉(玉峰) 7호분에 관한 것이다.당시 출토되었던 유물의 대부분은 일본 동경대학으로 옮겨졌다가 최근에 소개되어 알려졌다. 수정봉 2호 고분은 깬돌로 쌓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널길(연도)이 가운데 있으며, 널방(현실)의 규모는 길이 532㎝, 너비 176㎝, 높이 230㎝이다. 수정봉 3호 무덤도 2호 무덤과 크기와 형식이 비슷하며, 현재 남아 있지 않은 옥봉 7호 무덤은 봉분의 형태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수정봉 2·3호와 유사할 것으로 생각된다.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류·철기류·가락바퀴·구슬·철칼·창·도끼·재갈들이 있다.이 무덤들은 무덤의 형식과 구조, 출토유물로 보아 백제와 대가야의 관계 설명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며, 진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야 문화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곳이다.옥봉고분군에는 7기의 대형봉토분이 구릉 정상부에 열을 지어 축조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대형분의 분포양상은 인접한 함안의 말이산 고분군과 비견될 만한 것으로 특정집단의 수장급 묘역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출토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말에 착장하는 기꼿이인 철사와 청동합 등이다. 철사는 각 지역의 수장묘제인 경주금관총, 금령총, 양산부부총, 합천 M3호분 등에서 출토되고 있다. 청동합은 공주의 무령왕릉이나, 경주의 황남대총, 천마총, 금관총, 고령지산동 44호분, 합천 M3호분 등 역시 제 지역의 수장묘에서 출토되고 있다. 고분의 축조 시기는 고배와 기대, 대부장경호등의 형태를 통해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진주 한 향토사학자는 옥봉 고분군 일대는 고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곳일 뿐만 아니라 진주시의 연혁을 증명하는 유적지이며 교육적 가치가 아주 높은 문화유산이 있는 곳이라고 주장하면서, 귀중한 유적 고분 5기는 찾을 길이 없으며 2기는 봉분 상단부가 절단되어 원형이 훼손되어 있어, 이 지방에 있었던 가야와 백제의 역사를 알리는 공원 또한 문화 유적을 발굴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역사를 주제로 한 역사공원 조성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경남지역 문화사 이야기에서 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