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진안 향교
진안향교는 1414(태종14)년에 진안읍 군상리 웃새골에 창건 하였으나, 임진왜란때 완전히 불타 없어져 1601(선조34)년에 중건 하였으며, 1636(인조14)년에 현 위치에 이전하여세웠다. 진안향교를 이전하게 된 것은 1601년에 향교를 중건한 뒤 관아와 인가가 멀리떨어져 불편한 때문이라 하며, 이기록은 왕조실록에도 보인다.즉, 인조11년(1633년) 11월16일조에 전라감사의 치계에 의하면 '진안고을의 향교가 관아와 멀고 관리하는 하인의 수가 적어 제대로 수호하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지대가 낮고 습하여 건물이 썩고 있으니 좀 더 인가에 가까우면서도 넓고 트인곳으로 옮겨 세우도록 허락하여 달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사정으로 1636년에 지방 유림들의 헌금으로 지금의 위치로 이축한 것이다. 진안향교는 앞에 학교의 역할을 하는 명륜당이 배치되어 있고, 뒤에 향사를 모시는 대성전이 배치되어 있다. 전체 공간은 명륜당과 동재, 서재로 이루어진 교육공간과 대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에 의해 이루어진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 구성되어 있으며, 동쪽으로는별채로 향안당이 있다. 동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현재는 서고로 쓰이고 있다. 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향안당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진안향교는 1984년 12월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 14호로 지정되었다.대성전은 내삼문 안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2칸의 맛배 지붕 건물이다. 1632년에 건립하였으며, 이후 기단과 내부 마루를 보수한 것을 빼고는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간단한 구조 형식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크다.구조물의 조각 형식이 거의 없어 매우 단조로운 편이다. 대성전 안에는 1734(영조 10)년에 제작된 공자상이 모셔져 있으며, 이곳에 봉안된 선현들은 공자를 비롯한 송대(宋大)의 사현(四賢), 공문십철(孔門十哲), 우리나라 고려조 사현(四賢), 조선조 사현(四賢)등모두 27위를 배향하고 있다.명륜당은 회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위치한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구체적인 건립시기는 기록이 없어 알수 없으나, 건물의 상태로 보아 수차례의 중수를 걸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명륜당은 본 시도 지방의 관립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한 때는 현 진안 초등학교 전신인 사립 진안 문명학교의 학당으로 사용된바 있다. 향안당은 향교 경내에 내문을 갖추고 별채로 들어서있다. 향안(鄕案)을 글자 그대로하면 지방의 내력을 적은문서를 이름하므로 향안당은 서고(書庫)쯤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나 이 향안당에 걸린 편액에 의하면 향안당은 본래 사마재(司馬齋)라 이름 하였고 선비들이 일시 기거, 강습 하였던 곳이라 한다. 이 건물은 영조 정축(丁丑)년에 건립 되었다가 무진(戊辰)년에 중건 된것으로 편액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1928년 인듯 하다.현재 향교는 읍내에 위치하며 대성전 후면쪽을 제외하고는 그 일곽을 좁은 도로가 감싸고 있다. 일아래쪽에 위치한 홍살문을 들어서면 외삼문 위치까지는 민가가 좌우로 있으며 외삼문 안으로는 명륜당을 바로 보고 서게 된다. 보통은 동·서재가 명륜당의 전면좌우에 위치하나 여기서는 후면에 위치하여 내삼문과 이루는 중정이 아늑해 보인다. 명륜당 보다 한 단 높은 대지 위에 설치된 대성전 공간에는 일곽이 담장으로 구획되었을뿐동·서무 등의 부속사는 없다. 홍살문부터 대성전까지는 일직선상에 위치하여 전학후묘 의 기본적 배치를 하고 이 축을 중심으로 관리사 및 창고, 사마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