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高 金容捧 2013. 11. 14. 05:30

2013년11월8일 금요일

식영정(息影亭)은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의 정자로 조선 명종15년(1560)에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었다.식영정에 올라 뒤뜰의 적송사이로 내려보이는 성산사(聖山祠)1721년 부터 식영정을 지켜온 소은 정민하와 그의 장남 계당 정근 등 일곱분의 제향을 모시고 있으며 오래전에 없어진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고 한다.석천 임억령은 이곳에서 식영정 20영(影)을 지었는데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의 제자들이 차운하였으며, 3명의 제자를 포함임억령까지 4사람을 식영사선(息影四仙)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그래서 식영정을 달리 사선정(四仙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이곳에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기념탑이 있는 것은 정철이 어린시절 식영정인근의 환벽당에서 임억령의 사위인 김성원과 공부를 하였고, 임억령에게 시를 배웠으며 부용당과 서하당을 다니며 학문을 공부하고, 훗날 성산별곡(星山別曲)등 많은 시가(詩歌)를 지었기에 식영정일원을 송강 문학의 산실로 부르게 된 것이다.송강정철에 대해서는 인물에 대한 평이 각양각색 이길레 어느 한쪽의 말을 듣고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다.그래서 송강 정철에 대한 부분은 송강정 편에서 역사적사실에 의한 판단과 그에 따른 반대논리를 소개할 생각이다.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36세때인 156년 경에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건물인 서하당(棲霞堂)은장인 임억령을 위해 식영정을 먼저 짓고 나서 바로 자신의 별장인 서하당과 부용당을 근처에 같이 지었다고 한다.병자호란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95년 담양군에서 이곳에 다시 복원하였다.그러나 서하당과 부용당이 자리한 터는 일반적인 정자의 개념으로 본다면 다소 의외의 장소에 있음을 알 수 있다.소쇄원이 깎아 지른 계곡을 벗삼아 자리잡고, 환벽당과 취가루 역시 조그만 동산의 몬당에 있으며, 바로 옆의 식영정만 봐도수십개의 계단을 걸어올라야 되는 풍광 좋은 곳에 위치해 있고, 저 멀리 송강정과 면앙정도 수십개의 계단을 땀 뻘뻘 흘리며올라가야 되는 풍광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계곡과 하천가, 또는 동산의 몬당위에 세워져 있는 대부분의 정자와 달리 서하당과 부용당을 식영정부근에 나란히 복원시켜 놓은 것은 그 연유를 알지 못하지만 분명 정자가 들어설 만한 위치가 아님을 금방 알수가 있다.하지만 그 옛날 자미탄이 어떻게 구비져 흘렀는지에 대한 지형적 자료가 없기에 식영정아래 구비져서 흐르는 자미탄 물줄기는분명 서하당과 부용당 근처까지 넘실댔을 것으로 보이고, 서하당이 장인 임억령을 위해 식영정을 짓고 자신을 낮추며 옆에서 보살폈다면, 아마도 식영정이 바라보이는 지척에 서하당과 부용당을 지었을 것으로 보이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세워진 듯 하다.블러그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