릉(稜) 고분 (古墳)

경주 대릉원(미추왕릉)

雲高 金容捧 2019. 11. 3. 17:22

2019년10월12일 토요일

대릉원은 시내를 멀리서 바라볼 우뚝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능들이다 경주의 고분들이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당시의 다른 지역들에 견주어서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남산의 북쪽에서부터 국립경주박물관 자리와 반월성을 거쳐 황오동,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으로 이어지는 평지에는 고분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그 가운데 약 3만 8,000평의 평지에 23기의 능이 솟아 있는 황남동의 대릉원은 고분군의 규모로는 경주에서 가장 큰 것이다. 경주 시내 한가운데에 있어 찾기도 무척 쉽다. 큰 나무 없이 잔디떼가 잘 입혀져 있어 동산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1970년대에 엄청난 예산을 들여 공원화하기 전에는 멀리서도 황남대총의 우람하고 아름다운 능선이 한눈에 들어왔으나, 담장을 둘러치고 무덤 앞까지 주차시설을 만들고 무덤 안 길을 닦는 바람에 옛 정취는 사라지고 말았다 대릉원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내부가 공개되어 있는 천마총과 이곳에 대릉원이라는 이름을 짓게 한 사연이 있는 미추왕릉, 그리고 그 규모가 경주에 있는 고분 중에서 가장 큰 황남대총 등이다. 남아 있는 23기의 능말고도 무덤 자리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봉분이 있는 무덤들만 남겨두고 모두 지워버렸다고 한다 대릉원의 각종 고분들에서 출토된 대표적 유물들은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미추왕릉은 대릉원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능으로 능 앞에 대나무밭이 있고 능문이 세워져 있다 미추왕은 제13대 왕으로 성은 김씨이고 알지(閼智)의 자손이다. 『삼국사기』에 “미추왕은 백성에 대한 정성이 높아 다섯 사람의 신하를 각지에 파견하여 백성의 애환을 듣게 하였다. 재위 23년 만에 돌아가니 대릉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 대릉원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제14대 유례왕 때의 일이다. 적국인 이서국이 쳐들어와 곤경에 빠져 있는데, 어디선가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원병들이 나타나서 순식간에 적을 무찔러 위급한 상황을 면하게 해준 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신라의 병사들이 괴이하게 여겨 대나무잎의 행방을 잘 조사해보니 그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 앞에 높이 쌓여 있었다. 이후 미추왕릉을 ‘죽릉’ 또는 ‘죽장릉’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도 국난이 있을 때마다 여기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능.돌무지덧널무덤·쌍무덤으로 황남동고분군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40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만 2,908㎡이다. 이 고분군 내에 있는 황남대총의 일련번호는 ‘황남동 98호분’이다. 황남대총은 1973년 7월과 1975년 10월에 문화재관리국 조사단이 발굴조사하고, 1980년 문화재위원회 회의에서 붙여진 별칭으로 황남동에 소재한 신라 최대의 고분이라는 의미다 현재 외형이 복원되어 있는 황남대총은 2개의 원분(圓墳)이 남북으로 연접된 표형분(瓢形墳)으로 동서 지름 80m, 남북 지름 120m, 남분 높이 23m, 북분 높이 22m에 이르는 신라 최대의 봉토분(封土墳)이다. 황남대총 남분의 피장자는 남자, 북분의 피장자는 여자이며 신라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봉토와 봉토의 기저부(基底部) 주위에 쌓은 바깥 둘레돌[護石]의 남·북분 연접상태로 볼 때, 먼저 남분이 축조되었고 뒤에 북분이 남분에 잇닿아 축조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남·북분 각각 봉토의 중심부에 덧널과 돌무지[積石]가 설치된 고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두 고분 모두 돌무지 부분 내부에서 나무기둥을 줄지어 세웠던 기둥구멍과 기둥 사이를 연결했던 횡가목(橫架木)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목조가구(木組架構)를 먼저 설치하고 그에 맞춰 돌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돌무지 부분 안에 설치된 이러한 목조가구는 고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을 계보상으로 북아시아 덧널무덤과 더욱 가깝게 접근시키는 중요한 근거로서 주목받고 있다 남분의 돌무지 부분 안에는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이 동서로 배치되어 T자형을 이루고 있었다. 장축방향은 으뜸덧널이 동서로, 딸린덧널은 남북으로 두었다 으뜸덧널은 원지표를 약 45㎝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한 바닥 위에 세운 내외 2중의 덧널으로 되어 있었다. 바깥덧널[外槨]은 동서 길이 6.5m, 남북 너비 4.1m, 높이 약 3.5m이고, 안덧널[內槨]은 동서 길이 4.7m, 남북 너비 2.3m, 높이 약 1.8m이다. 안·바깥덧널 사이에는 잔자갈이 채워져 있었다 안덧널의 가운데에는 내외 이중의 널[木棺]이 동서로 놓여 있었다. 바깥널[外棺]은 동서 길이 3.6m, 남북 너비 1m, 높이 약 0.8m이다. 안에 칸막이를 세워 동쪽은 껴묻거리 수장부[副葬品收藏部]로 되어 있었고, 서쪽에는 안널[內棺]이 안치되어 있었다 안널 안에서는 60세 전후의 남자로 판단되는 피장자의 유골 일부가 출토되었다. 또한 이와 함께 피장자가 착장했던 금동관·금제관드리개[金製冠垂飾]·금제목걸이·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가슴장식, 금제허리띠[銙帶]와 띠드리개[腰佩]등의 장신구, 금동장고리자루큰칼[金銅裝環頭大刀]1개가 출토되었다 껴묻거리 수장부에는 윗부분에 금제관식·금동관·은관(銀冠)·은모(銀帽)·금동신·은제허리띠와 띠드리개·금은반지·금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10여 개의 금은장고리자루큰칼, 은제정강이가리개[銀製脛甲]가 놓여 있었다 그 밑에는 각종 금속용기, 칠기(漆器), 봉황머리모양병[鳳首形甁]등의 유리용기 등이 담겨 있었다. 바닥부분에는 쇠솥과 각종 토기들이 놓여 있었다 껴묻거리 수장부·윗부분의 바깥널 뚜껑 위에도 금동제 정강이가리개, 비단벌레날개로 장식된 금동허리띠 등이 놓여 있었다. 바깥널과 안덧널 사이의 잔자갈층 위에서도 각종 토기와 철기가 출토되었다.으뜸덧널 내부에서는 순장(殉葬)된 것으로 보이는 20대 여자의 유골 일부도 발견되었다. 바깥덧널의 뚜껑부분에도 금제귀걸이를 비롯한 각종 장신구와 토기, 철제무기, 마구류가 배치되어 있었고, 새무늬[鳥文]가 새겨진 청동제거울 1점도 출토되었다.딸린덧널은 으뜸덧널과 3m 두께의 냇돌벽을 사이에 두고 그 서쪽에 설치되었으며, 규모는 남북 길이 5.2m, 동서 너비 3.8m, 높이 약 1.3m이다. 흙바닥에는 각종 껴묻거리가 여러 겹으로 쌓여 있었다. 딸린덧널 안에서는 7구분의 안장틀[鞍橋]과 거기에 부속된 각종 마구류, 300여 점의 철제무기와 이기(利器), 1,500여 점의 각종 토기가 출토되었다.그 중 안장틀을 비롯한 1세트의 마구는 모두 용(龍)무늬가 투조된 금동판 밑에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 장식한 호화찬란한 것이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쇠투겁창[鐵矛]는 형식이 10여 종이었다. 쇠스랑·가래끝 등의 농기구도 30여 점 포함되어 있었다.북분은 남분의 북쪽 끝 봉토 일부를 절개하고 축조한 돌무지 부분 가운데에 장축을 동서로 둔 덧널이 하나만 설치되어 있었다. 동서 길이 6.8m, 남북 너비 4.6m, 높이 약 4m 규모의 외덧널[單槨]로 되어 있는 덧널의 바닥은 지반을 약 50㎝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되었다.덧널 안에는 동쪽을 제외하고 잔자갈로 쌓은 너비 80㎝, 높이 55㎝의 ‘ㄷ’자형 석단(石壇)이 돌려지고 그 안에 널이 놓여 있었다. 널은 남분과 같은 구조의 이중 널으로 길이 3.3m, 너비 80㎝, 높이 약 80㎝였다.바깥널의 서쪽 부분에 안치된 안널 안에서는 동쪽에서부터 금관과 3쌍의 금제관드리개, 금구슬과 유리구슬로 된 목걸이, 금제허리띠와 띠드리개, 11개의 금팔찌, 12개의 금반지 등 피장자가 착장했던 각종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안널에서는 장신구만 출토되었으며, 허리띠의 좌우 양편에 5쌍의 귀걸이형 장신구가 띠드리개와 함께 수장되어 있어 이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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