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성(邑城) 산성(山城))

대구 칠곡 가산산성 (사적216호)

雲高 金容捧 2017. 10. 13. 04:28

2017년10월8일 일요일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산성(山城)으로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산98-1 외 11필지에 위치하는 조선 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사적 제216호로 지정되었으며, 주변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산성은 해발 901.6m의 천험(天險)의 가산 골짜기를 이용하였고 내·중·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사대문지와 암문·수구문·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있다. 성(城) 내에는 물이 풍부하여 산성 입보의 시설을 갖추고 있고 내·중·외성은 각기 시대에 따라 따로 축성되었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가산(架山) 요새에 삼중(三重)으로 축성되었다. 1639년(인조17)에 경상도 관찰사로 제수된 이명웅(李命雄)[1590~1642]이 “경상도 60주(州) 산성 중에 믿을 만한 곳은 진주(晋州)·금오(金烏)·천생(天生)의 3성 뿐이므로 적지(適地)에 축성할 것”을 상주(上奏)하였다. 도임 후 천생산성(天生山城)은 형세가 험하기는 하나 좁고 천정(泉井)이 없으므로, 금오산성(金烏山城)을 가축(加築)하는 한편, 최적지인 팔거현의 가산(架山)에 축성할 것을 계청(啓請)하고, 그해 9월부터 이듬해(1640년) 4월까지 내성을 쌓았다. 가산산성이 축성되면서 5월에는, 경산부(京山府)[현재 성주]에 속했던 팔거현이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로 승격되고, 이후 약 180년 동안 부의 치소(治所)인 읍치를 산성 내에 두었으며, 진관(鎭管)은 4개 현[군위, 의흥, 신령, 하양]을 관장하였다 칠곡도호부 관아(官衙)가 험준한 산정에 있게 된 후, 읍민들은 불편한 점이 많아 관아를 옮기기를 갈망하여 왔다. 1819년(순조 19)에 왕명(王命)에 의하여, 평지인 팔거구지(八莒舊地)로 읍치를 옮기고, 이후로 가산산성 수성은 가산진의 별장이 담당하였다. 1648년(인조 26)에는 제6대 칠곡도호부사 이지형(李枝馨)[1608~?]이 경상감사 이만(李曼)[1605~1652]과 합심하여, 군병과 승려를 동원하여 불과 수개월 만에 건물(建物)·포루(砲樓)·남쪽 곡성(曲城)·북쪽 구책(舊柵) 등을 중수(重修)하였다. 외성(外城)은 1700년(숙종 26) 경상도 관찰사 이세재(李世載)[1648~1706]의 장문(狀聞)[임금에게 글을 올림]으로 왕명을 받아 1701년에 완성하였다. 중성(中城)은 1741년(영조 17) 경상도 관찰사 정익하(鄭益河)가 장문하여, 왕명으로 그 해에 완성되었다. 가산산성에는 식량과 병기를 충분히 비축할 양창(糧倉)[남창·북창]·군기고(軍器庫)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중성의 성벽은 내·외성에 비해 작고 동문은 홍예문(虹霓門)[무지개문]이었다. 1812년(순조 12)에는 가산산성에 별장(종9품)을 두고 가산진(架山鎭)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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