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 한옥(韓屋)

제주 김만덕 객주

雲高 金容捧 2016. 6. 1. 05:30

2016년5월26일 목요일

조선 후기 제주의 여성 자선 사업가로 본관은 김해. 증조부는 김성순()이며 조부는 김영세()로 김응선(), 김응남(), 김응신(), 김응열()의 4형제가 있었다. 아버지인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2남 1녀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김만석(), 김만재() 두 오빠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사별하고 외삼촌 집에 기탁되었으나 여의치 않아 기생 월중선()에 보내져 11살에 기적()에 오르게 되었다. 김만덕은 관가에 나가 기녀 명단에서 삭제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제주목사 신광익()과 판관 한유추()를 찾아가 본래 양가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부득이 기녀가 되었으나 위로 조상에게 부끄러우니 다시 양녀()로 환원시켜 준다면 집안을 일으키고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겠다고 약속하고 기녀 명단에서 제명받았다 김만덕은 객주집을 차리고 제주의 특산물인 말총·미역·전복·양태·우황·진 등을 서울 등지에 팔거나 기녀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양반층 부녀자의 옷감·장신구·화장품 등을 염가로 공급하여 천 냥 부자가 되었다 1790년(정조 14)부터 1794년(정조 18)까지 5년간 제주에 흉년이 들어 제주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다. 김만덕은 1천금을 내놓아 배를 마련하고 육지로 건너가 연해에서 곡물을 사들여 10분의 1은 내외 친척과 은혜를 입은 사람과 일부는 가족들에게 주었고, 나머지 450석은 모두 관가로 보내어서 구호곡으로 쓰게 하였다 김만덕의 선행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조()는 그녀를 궁궐로 불러들였다. 평민은 궁궐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김만덕에게 내의원의 의녀반수()의 직을 제수하였다. 이후 영의정 채제공과 선혜청의 배려로 조선의 명산인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김만덕에 대한 기록은 여러 자료에 전해지고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정조실록』과 체제공()의 『번암집()』에 들어있는 「김만덕전()」이다. 이후 유재건()의 『이향견문록()』과 김석익()의 『탐라기년()』 등에도 들어있다 채제공은 ‘적선지가 필유여경( : 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이라는 글을 김만덕에게 써주었으며, 당시 제주도에 유배 중이던 김정희()는 김만덕의 양자 김종주에게 ‘은광연세(: 은혜로운 빛은 길이 빛나리)’라는 글을 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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