릉(稜) 고분 (古墳)

대구 불로동 고분군

雲高 金容捧 2015. 12. 27. 20:54

2015년12월27일 일요일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고분군으로 사적 제262호. 불로동과 입석동의 구릉 서남사면에 분포한다. 1945년 8·15광복 이전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달성군 해안면 불로동과 입석동에 속해 있었다. 이 지역의 고분군은 서로 30m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다.1938년 11월 조사 때 입석동쪽 고분 2기를 조사해 학계에는 ‘해안면고분’으로 보고되었다. 그 뒤 1963년 12월과 1964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경북대학교박물관에서 불로동 고분 2기를 조사한 뒤, 다시 입석동고분을 포함해 ‘대구불로동고분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봉토의 지름은 21∼28m 내외이고 높이는 4∼7m 정도가 보통이다. 그러나 해안면 제1호분의 경우 서쪽에 같은 규모의 또 다른 봉토가 접해 있어서 외형이 마치 표형분(瓢形墳)처럼 보인다. 조사는 동쪽 봉토에서만 행해져 돌방이 확인되었다.봉토는 깬자갈로 형성하고 표면만 흙을 덮어 마치 돌무지무덤〔積石塚〕과 같은 형상을 하였다. 이 제1호분의 규모는 동서 62m, 남북 28m, 높이 7m의 크기이다.돌방은 장축이 정동서(正東西) 방향을 취하고 있다. 제1·2호, 갑·을호 등 4기 모두가 같다. 그리고 제1·2호의 경우는 돌방이 봉토 중심의 지면에 올라와 있어 대구지방고분과는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또 다른 특징으로는 평면이 세장(細長)하고 천장이 높은 것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제1호의 경우는 너비에 대한 길이 또는 높이의 비가 대단히 커서 돌방의 형태로서는 특이한 모습을 나타낸다.제1·2호는 돌방의 중간에 계벽(界壁)을 쌓아 앞방〔前室〕과 뒷방〔後室〕을 구분하였다. 앞방에는 시체를 안치하고 뒷방에는 부장품만을 격납(隔納)하였다.벽체는 얄팍한 할석으로 길이모쌓기를 하였다. 벽면은 벽돌을 쌓아올린 듯 정연하다. 바닥은 생토 위에 모래를 깔고 그 위에 바로 시체를 올려놓은 듯하다. 철제꺾쇠가 30여 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다른 목재의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뚜껑돌〔蓋石〕은 판상석(板狀石)을 가로로 덮었다. 바깥면에는 점토를 두껍게 바른 위에 자갈을 덮었다.대체로 불로동고분과 같이 세장한 돌방형의 고분은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으로 판단되어왔다. 그러나 제1·2호분을 자세히 관찰하면 구덩식이라기보다는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으로 판단할 수 있는 몇 가지 자료가 발견된다. 돌방 깊이가 2m 정도로 깊고, 계벽이 받침목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제2호분의 부장품으로는 서쪽 단벽 가까이에서 토기와 철도끼〔鐵斧〕가 나왔고, 중앙부에는 철제꺾쇠가 흩어져 있었다. 딸린방〔副室〕에는 전면에 유물이 배치되어, 대형 항아리 6점을 중앙에 두 줄로 배열하고 그 사이사이에 소형 토기들을 겹쳐놓았다.을호에서는 말띠드리개〔杏葉〕 3점과 말재갈 등 말갖춤〔馬具〕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도굴을 면한 제1호의 뒷방에서 철제품 또는 말갖춤이 발견되지 않은 것을 볼 때, 토기 외의 이러한 유물은 시체와 함께 앞방에 배치된 듯하다.유물 중 주목되는 것은 흑색의 뾰족밑단지〔尖底壺〕이다. 보통의 둥근밑〔圓底〕 중심에 뾰족한 다리를 하나 붙인 형태로서 몸체에 2개의 뾰족한 귀가 붙어 있다. 이러한 토기는 제2호와 갑·을호에서 각각 1점씩 출토되었으며, 그 크기는 아가리 지름〔口徑〕 13.6㎝, 높이 13.3㎝ 정도이다.그 밖의 토기로는 굽다리접시〔高杯〕·긴목단지〔長頸壺〕·둥근밑단지〔圓底壺〕·그릇받침〔器臺〕·뚜껑접시〔蓋杯〕 등이 있다. 모두 신라토기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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