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성(邑城) 산성(山城))

강화산성

雲高 金容捧 2015. 4. 24. 12:31

2015년4월18일 토요일

남문=남장대=서문=북문=동문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고려시대 산성으로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해서 쌓은 산성으로,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으며, 성문 4곳과 첨화루(瞻華樓)·안파루(晏波樓)·진송루(鎭松樓) 등의 문루, 암문(暗門)·수문(水門)·장대(將臺) 등의 방어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현재 강화읍 동쪽의 성벽은 없어졌지만 남쪽과 북쪽의 성벽은 잘 보존되어 있다. 몽골군의 침입,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수많은 외세 침략의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1232년(고종 19) 6월에 최우(崔瑀)는 몽골군 침입에 맞서 강화로 천도하면서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하였다. 다만 이 때 왕궁과 도성 시설을 모두 갖추지는 않고,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산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둘레가 약 1.2㎞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1250년에 둘레 약 9㎞로 쌓은 토성인데, 선원면의 토성터가 이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중성에는 8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모두 송도에 있던 성문의 이름을 본따서 동쪽의 선인문(宣仁門), 서쪽의 선기문(宣祺門), 남쪽의 태안문(泰安門), 북쪽의 북창문(北昌門), 동남쪽의 장패문(長覇門), 서남쪽의 광덕문(光德門), 서북쪽의 선의문(宣義門), 동북쪽의 창희문(彰熙門) 등으로 불렀다. 외성은 중성을 수비하려고 1233년부터 쌓기 시작한 뒤, 1235년 12월에는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실시하여 각 주현(州縣)의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고서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 3만 7,070척의 길이로 쌓았다. 토성인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강화를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위시설이자 강화로 천도한 고려 정부가 39년 동안 육지로부터 보급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었다.1259년에 고려가 몽골과 강화하자, 몽골은 그 조건으로 주자(周者)와 도고(陶高) 등을 보내 내성을 헐고 외성까지도 모두 헐었다. 당시 역사(役事)는 몽골의 지나친 독촉으로 인해 동원된 백성의 고통이 매우 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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