릉(稜) 고분 (古墳)

부여 의자왕 묘

雲高 金容捧 2015. 3. 26. 08:35

2015년3월23일 월요일

백제의 제31대 건길지이자 마지막 왕으로 30대 무왕의 장자로, 632년에 태자가 되었으며 641년에 즉위하였다. 삼천궁녀를 들였다는 루머가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당시 당나라에 치여 국력이 쇠퇴해가던 고구려보다 더 융성하게 백제의 국력을 신장시키고 백제를 7세기 중반 삼국 중 최강국으로 만들어 깡패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더욱 더 강력한 당나라의 비위를 거슬러서 순식간에 멸망 했다 예로부터 평가가 심히 엇갈렸던 왕으로, 재위 중반기 까지만 해도 숙적인 신라를 몰아 붙이며 아버지 무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었던 명군이었으나, 재위 15년(655)에 접어들어서는 주색을 탐하는 혼군으로 전락하여 백제를 망하게 하였다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승자의 역사. 즉 당나라와 신라에 의해서 의자왕의 업적이 많이 곡해된 것으로 많은 역사학자들이 보고 있다.백제 역사 상 가장 기록이 많이 남은 왕 중 한 명이며,《삼국사기》에서 백제의 왕들 중 유일하게 한 권을 모두 장식한 왕이다.《삼국사기》에서 백제 본기는 총 6권임을 생각해보면 그 분량이 어마어마하다.백제왕(百王) 부여의자(扶余慈)와 왕비(王妃) 은고(恩古)와 태자(太子) 부여융(扶余隆)과 왕자(王子) 부여태(扶余泰)를 비롯하여 13명의 왕족(王族)들과 700여 명의 백제고관(百高官)들과 장수(将领)들을 포함하여 모두 12000여 명의 백제(百济) 상층(层) 인사(人士)들을 데리고 당(唐) 나라로 들어왔다.당고종(高宗) 황제(皇帝)는 백제(济) 왕실(王室)들에게 특사령(特赦令)을 내리고 고규격(高格) 정치(政治) 예우(遇)를 해주었으며 당 나라 민족(民族)들과 대가정(大家庭)을 형성하라고 어명을 내렸다.얼마 후에 부여의자(扶余慈)는 세상을 떠나고 당고종(高宗) 황제(皇帝)는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大夫)를 하사하고 위위경(尉卿)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의자왕의 시신을 대당(大唐) 명장(名将) 진숙보(秦叔宝)의 묘(墓) 옆에 안장하여 주었으며 의자왕의 묘 옆에 묘수(墓树)와 비석(碑石)도 세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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