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서원(書院)

부안 반계서원

雲高 金容捧 2015. 3. 18. 05:05

2015년3월15일 일요일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128-7 반계 유형원은 본관 문화(). 자 덕부(). 호 반계(). 서울 출생.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 《서경()》 〈우공기주편()〉을 읽고 매우 감탄하였다고 한다. 외숙 이원진()과 고모부 김세렴()에게 사사하였고, 문장에 뛰어나서 21세에 《백경사잠()》을 지었다. 23세 때 할머니 상()을 당하고, 27세에 어머니 상, 30세 때 할아버지 상을 당하여 전후 9년간 상복을 입었으며, 지평()·여주() 등지로 옮겨 살았다.이러한 환경변화는 사상과 생활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653년(효종 4) 부안현 우반동()에 정착하였다.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면서 수차 전국을 유람하였다. 1665년, 1666년 두 차례에 걸쳐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는 한편, 구휼()을 위하여 양곡을 비치하게 하고, 큰 배 4,5척과 마필() 등을 비치하여 구급()에 대비하게 하였다. 학문은 성리학·역사·지리·병법·음운()·선술()·문학 등에 두루 관심을 가졌다. 당시 조선왕조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으로 피폐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한 처방이 필요하였다.이에 저서 《반계수록()》을 통하여 전반적인 제도개편을 구상하였다. 중농사상에 입각하여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전제()를 개편, 세제·녹봉제(祿)의 확립, 과거제의 폐지와 천거제의 실시, 신분·직업의 세습제 탈피와 기회균등의 구현, 관제·학제의 전면 개편 등을 주장하였다. 뒷날 이익(홍대용(정약용() 등에게 이어져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였으나, 정책으로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다만 학문적 가치가 인정되어, 1770년(영조 46) 영조의 명으로 《반계수록》 26권이 간행되었다. 실학을 최초로 체계화하였으며, 이 밖에 20여 종의 저서와 문집을 남겼으나 남아 있지 않고, 위의 《반계수록》과 《군현제()》 1권이 전할 뿐이다. 호조참의()·찬선()에 추증되었고, 부안 동림서원()에 제향되었다.이터는 조선 효종(1649-1659)과 현종(1659-1674)때 실학자로 활동한 유형원(1622-1673)이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던 곳입니다.반계라는 호로 더욱 널리 알려진 유형원은 병자호란(1636)이후 서울을 떠난 여러 곳을 옮겨 살다가 효종4년(1653)선대의 자취가 남아있는 변산반도 기슭의 이곳 우반동으로 이사하여 학문에 몰두하였습니다.그는 뛰어난 학문으로 여러 차례 벼슬에 추천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평생을 야인으로만 살았으며, 농촌을 부하게 하고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하는데 학문의 목적을 둔 사람이었습니다. 조선후기의 수많은 실학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저서로는『반계수록』이 있습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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