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좋은 순천(順天) 소식

순천가서 인물자랑 말라

雲高 金容捧 2012. 8. 25. 04:59

자네, 이 말 들어 봤어?”
“먼 말?”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말 말여. 근디 그 말이 왜 나왔으까?”
“자네가 잘 모르고 하는 소리여! 그 말이 아녀!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가 아니고 옷 자랑하지 말라여! 말을 할라면 똑바로 알고 해!”

‘인물 자랑이냐 옷 자랑이냐’
순천에서 어쩌다 말전지(실마리)가 터지면 ‘인물 자랑이냐 옷 자랑이냐’ 하는 문제가 말거리가 된다. 그러면 ‘여수에서 돈 자랑 말라’,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따라서 나온다. 이러한 경향은 지근한 도시라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리고 ‘죽은 광양 사람 한 사람을 순천의 산 사람 열이 못 해 본다’는 말도 튀어나오곤 한다.

왜 그럴까? 언제부터 이런 말이 생겼을까?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시원스런 대답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말이 나온 배경이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그 지방 사람들의 행동양식의 특성에 따라 이러저러한 말이 세상에 퍼졌다. 상대 지방을 얕잡아 보거나 비아냥거리는 뜻으로 나온 말도 있고, 부러워서 나온 말도 있다.

▲ 순천의 상징인 동천을 끼고 시가지가 펼쳐진 모습.


점잖은, 체통을 생명처럼 여기던 유생들 사이에 ‘전라도 팔불여(八不如)’가 회자(膾炙)되었다. 부러워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불여(不如)는 ‘…만한 것 없다, …이 제일이다’란 뜻으로 좋고 훌륭하고 뛰어난 것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이것이 최고라고 할 때 ‘불여○○’이란 표현을 써왔다.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문장가는 장성만한 곳이 없다/ 관불여전주(官不如全州)-지방장관은 전주 관찰사만한 것이 없다/ 인불여남원(人不如南原)-인물 많기로 남원만한 곳이 없다
지불여김제(池不如金堤)-저수지는 김제 벽골제만한 것이 없다/ 강불여곡성(江不如谷城)-큰 강이 흐르는 곳은 곡성만한 곳이 없다/ 산불여구례(山不如求禮)-산은 구례만큼 큰 곳이 없다/ 결불여나주(結不如羅州)-경지 면적 넓기는 나주만한 곳이 없다/ 지불여순천(地不如順天)-지역이 넓기는 순천만한 곳이 없다, 지주가 많기는 순천만한 곳이 없다>


▲ 1960년대 삼산면 망북 일대 모습(순천시 제공).



▲ 1930년대 순천 중심지 모습(순천시 제공).


지주에게 목을 맡긴 소작인의 눈물도 많은 땅


유학자의 혜안과 문장으로 뛰어난 기대승(奇大升) 같은 인물을 가진 장성, 황희 정승처럼 인품이 전국을 감동하게 한 훌륭한 인물을 길러낸 남원, 삼신산의 하나로 그 이름도 드높은 지리산이 있는 구례, 드넓은 평야라 농경지가 넓다는 부러움을 산 나주, 호남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그 큰 벽골제가 있는 김제, 섬진강과 보성강이 산 굽이를 관류하는 곡성, 이 모두 호남에서 제일을 자랑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지불여순천’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하나는 다스리는 지역이 넓다는 뜻으로 이는 관에서 보면 가렴주구(苛斂誅求)하기에 좋은 곳이란 의미가 내포해 있지만, 백성 입장에서 보면 수탈당하는 고장이라는 서럽디 서러운 가락이 흐르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지주(地主)가 많다, 부자가 많다는 뜻으로 보면, 자랑스러움도 있지만 바꾸어 생각해 보면 소작인의 눈물이 그만큼 많다는 말인 것이다. ‘한 부자가 열 고을 사람을 주리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지주, 곧 부자가 많다는 것은 그 밑에서 주린 배를 안고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하는 소작인이 많다는 뜻도 있다.

오늘날의 부자가 기업가라면 농본사회에서는 지주가 부자다. 농사지을 땅이 없는 사람은 지주에게 목을 맡기고 가난하게 살기 마련이다. 지주와 지주 자식들은 호의호식하며 으스대고 산다. 그런 부자가 순천에 많았다. 일제 때 호남 삼대갑부로 이름 날린 김사천(金泗川)을 비롯하여 천석군(千石君)이 열이 넘었다. 그들 자녀들이 좋은 옷을 입고 기름기 번질거리는 이마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면 보는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황홀해서 바라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인물이 많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 ‘지불여순천(地不如順天)’이라 했다. 땅 넓고 지주가 많기로는 순천만한 곳이 없다는 뜻. 첨
산에서 바라본 별량면 대곡리 일대(《순천 별량-별량면향토지리지》 수록사진).


전남설계사회장과 순천시 3대 의장을 지낸 순천경로당 당장 김인모(90객)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보자.
“인불여남원(人不如南原),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지불여순천(地不如順天)이란 말이 예로부터 있었는데 지불여란 말은 순천이 예전에 여수까지도 순천부사가 관장했던 행정구역이었어요. 땅이 넓으니까 지주가 많았어요. 그래서 순천이 지주의 도시였어요. 지주가 많다는 것은 부자가 많다는 뜻이거든요. 전라도에 맨 처음 중국 포목상이 순천에, 1920년쯤에 들어왔어요. 그 사람들이 비단장사 왕서방(왕자금)이었어요. 예전부터 순천은 음식 사치와 옷 사치가 많았기 때문에 ‘사치골’이라 불렀지요. 서민들은 미영을 직접 짜서(길쌈을 해서) 속옷을 비롯해 모든 의복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부자들은 속옷부터 명주베로 만들어 입고 바깥옷은 중국 사람들이 팔려고 가져온 비단(백색 명주가 아닌 무늬와 색상이 있는)을 사서 옷을 만들어 입었어요. 부잣집 자녀들이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다니며 자랑을 했어요.”

‘순천에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옷 잘 입고 사치한 사람이 많다는 뜻에서 ‘순천에서 옷 자랑하지 말라!’고 했던 말이 1950년 이후쯤부터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말로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순천 가서 인물 자랑 말라는 말이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게 된 연유는 이 곳이 교육의 중심지였던 이유도 크다. 전라선과 경전선 철도가 교차하고 호남·남해 고속도로의 시발지였던 순천은 오랫동안 교통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여수와 여천이 통합되고 광양이 시로 승격되기 전, 특히 고교평준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순천 인근 시·군 중학 졸업생 중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예외 없이 순천으로 유학을 왔다. 여수, 여천, 광양, 구례, 곡성, 보성, 고흥 등지에서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순천의 상급학교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각자의 고향에서 내로라하는 우등생들이 순천에서 치열한 각축을 벌였으니 웬만해선 공부 자랑 인물 자랑을 하기 힘들었을 게다. 실제로 순천에서 고교를 졸업한 수많은 학생들이 이른바 명문대학으로 대거 진학하고 사회적으로 출세한 뒤, 태생지와 상관없이 통칭 순천출신이 되었으니 순천에서 인물자랑 말라는 말의 유래에 신빙성을 보태준 셈이었다.

 

 

▲ 순천의 옷 자랑이 인물자랑으로 변한 연유로 순천여고 교복인 ‘세라복’을 꼽는 설도 있다. 교
복을 입고 다니는 청순한 여고생을 보면 누구나 미인으로 보였다는 것. 빛바랜 흑백앨범 속에
서 당시 여고생들의 모습을 본다(위). 1950년대 당시 조회광경도 덤으로 본다. 학교 운동장 너
머 초가집들이 오순도순 정겨워 자꾸 눈길이 간다. 앨범사진은 순천여고 1959년 졸업생인
황옥자(광주 용봉동)님이 제공.
ⓒ 전라도닷컴



60년v대vjarmf 순천여고 출신 미스코리아 진 나오면서 미인의 도시로


인물 자랑은 달리 미색 자랑이라고도 보여지는데 이 또한 연유가 있다. 순천여고 교복이 ‘세라복’이었다. 교복을 입고 다니는 청순한 여고생을 보면 누구나 미인이었다. 게다가 1960년대에 순천여고 졸업생이 ‘미스코리아 진’에 뽑힌 적이 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순천은 미인의 도시로 그 이미지가 전국에 심어지면서 ‘순천에 가서 인물(미인)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이다.

한때 순천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 順天’이란 시정 구호를 내걸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란 말을 가려낸 전 시장 조충훈씨도 순천에 가서 인물자랑하지 말라는 오래된 말로부터 겉과 속이 두루 아름다운 미인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드러내고 싶었을 거라고 본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는 사회 분위기가 빚어낸 그 지방의 특색을 드러낸 말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2000년대에 사는 우리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삶의 양태를 압축한 말을 만들어낼 능력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지방시대를 맞이해 지방문화를 꽃피우겠다고 설치고 다니는 분들이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중앙문화를 좇기에 급급한 경향이지 않은가. 그러니 자기 지방의 특색을 드러내는 말을 어찌 생산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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